탕에서 나오면, 어쩐지 마음의 고삐가 풀려 버린다. 거기에다 맥주라니, 더는 버틸 수 있겠는가. 문명이란 참으로 죄 깊은 것이다. 나는 나쓰메 긴노스케, 세상은 ‘소세키’라 부르고 있다만, 뭐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오늘은 도고 온천 후에 마시기 좋은 맥주를 소개하고자, 글을——아니, 목소리를 기록하게 되었다. 온천에서 나와, 피부에 아직 김이 맴도는 이 순간. 손에 들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바로 이 도고 맥주다. 황금, 호박빛, 그리고 칠흑 같은 색. 삼색의 맥주를 앞에 두고, 당신이라면 무엇을 고르겠는가. 시음은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 순으로. 이것이 철칙이다. 점차 무게를 더해가며 마시면, 혀끝의 감촉, 목 넘김, 단맛과 쌉싸름함까지 더욱 또렷하게 살아난다.
──그럼, 하나씩 차례로 소개해 보자.
먼저, 황금빛을 머금은 ‘봇짱 비어’다. 이름 그대로, 내 소설 『봇짱』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맥주는 ‘쾰쉬’라는 스타일에 속한다. 우선 향을 맡아 보라. 어떤 냄새가 느껴지는가.
사과? 아니면 서양 배? 이런 과일 같은 향은 쾰쉬 특유의 효모에서 비롯된다. 자, 한 모금 마셔보라.
쾰쉬는 독일 쾰른에서 태어난 맥주다. 과일 향이 나지만 목 넘김은 깔끔하고, 목을 스치듯 흘러간다. 목욕 뒤에 마시기엔 이보다 알맞은 맥주도 없을 것이다. 도고 맥주는 어느 것이든 목욕 뒤에 어울리도록 가볍고, 탄산은 다소 강한 편. 게다가 차갑게 얼려 둔다. 그중에서도 이 쾰쉬는 철저하게 목욕 후에 맛있도록 고안되었다고 한다. “맥주 따위 다 거기서 거기”──라 생각하던 옛날의 나 자신에게 꼭 알려주고 싶을 만큼.
재미있게도, 본고장 독일의 쾰쉬에는 일본의 ‘완코소바’와 비슷한 스타일이 있다 한다. 잔을 비우면 조용히 새로운 잔을 가져온다. 잔 위에 코스터를 올려 멈추지 않는 한, 웨이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새로운 잔을 가져다준다. 인간의 약함과 욕망을 제도에까지 승화시킨 이 방식, 참으로 흥미롭지 않은가.
‘봇짱’처럼 곧고 정의감 넘치되, 다소 성급한 이 맥주. 실로 내 작품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다음은, 세련된 붉은빛을 띤 ‘마돈나 비어’다. 마돈나는 내 소설 『봇짱』에 등장하는, 그 수수께끼의 미인 교사다. “피부가 희고, 세련된 머리에, 키가 큰 미인”이라고만 썼을 뿐, 대사 한 줄조차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널리 알려진 존재가 되었으니 참 묘한 일이다. 소설을 읽지 않은 이도, 마돈나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며 한 모금 머금어 보라.
캐러멜 맥아의 고소함이 코끝을 간질이고. 입에 머금으면, 단맛과 쓴맛이 복잡하게 어우러진다. 어쩐지 잡히지 않으면서도 잊히지 않는──마치 마돈나 그 자체 같은 맛이다.
이 맥주는 ‘알트비어’라 불리는 스타일.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난, 역시 유서 깊은 맥주다. 참고로 ‘알트’는 ‘오래된’이라는 뜻. 그러나 단순히 낡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역사 있는’ 혹은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것에 존경심을 담은 ‘오래됨’이다. 어쩐지 문학적이지 않은가?
자, 마지막 잔은 깊은 검은빛. 이름하여 ‘소세키 비어’다. ──어, 나 말인가? 뭐, 좋다. 이 맥주는 ‘스타우트’라 불린다. 스타우트란 말에는 ‘강하다’는 뜻이 있다. 과연 무엇이 강한지, 맛을 확인해 보길 바란다.
구운 맥아의 향이 피어오르고, 입안에서는 초콜릿 혹은 커피 같은 강한 쓴맛이 혀를 자극한다. 묵직하고 위엄 있는 이 풍모, 내 서재에서 깊숙이 의자에 앉아 있던 모습과 닮았다면 닮았다고 하겠다.
스타우트의 원형은 영국의 포터다. 공장이나 철도 등에서의 짐을 나르던 사람 = 포터들에게 인기를 끌던 맥주가 아일랜드에 건너가, 기네스에 의해 스타우트 포터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당시 맥주 세금은 맥아의 양으로 매겨졌는데, 기네스는 세금을 줄이기 위해 맥아 양을 줄이고, 대신 맥아화하지 않은 볶은 보리를 사용했다. 그 때문에 풍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재미있게도 스타우트는 온도가 올라갈수록 향이 열린다. 차갑게 마셔도 좋고, 손의 온기로 서서히 덥히며 천천히 음미하는 것도 또 다른 묘미다. 마치 문학처럼, 읽을 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 세 가지 맥주의 소개는 여기까지다. 이제는 각자 원하는 속도로, 마음에 드는 맥주를 즐기며 들어주기 바란다.
맥주는 기본적으로 물, 맥아, 홉, 효모——고작 네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다. 보리를 싹 틔워 맥아로 만들고, 뜨거운 물에 익힌다. 거기에 홉을 넣고, 효모를 더해 발효시킨다. 그 과정에서 맥아의 당분이 알코올과 탄산으로 변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틀 만에 맥주를 만든다는 곳도 있다지만, 도고 맥주는 꼬박 2주일을 들여 정성껏 완성하며, 언제나 갓 만든 맛을 전한다.
이 도고 맥주를 빚는 곳은 ‘미즈쿠치 주조’. 대대로 일본주를 빚어 온 양조장이지만, 한신 대지진을 계기로 맥주 만들기에 도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집안의 가훈이 이렇다——“가업의 상징을 지키지 말고, 깨부숴라”. 멋진 말이 아닌가. 옛것을 알고, 새것을 즐기다니. 바로 이것이 문화의 묘미다.
목욕 뒤, 차가운 맥주 한 잔. 아니, 세 잔. 누군가와 담소를 나누며 마셔도 좋고, 홀로 고요히 마셔도 좋다. 중요한 건,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풍경, 향이, 어느새 깊은 기억 속에 쌓여 간다는 것이다. 맥주의 맛은 언젠가 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한때의 맛──시간 그 자체의 맛은, 언제까지고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도고 온천에서, 목욕 뒤에 마신 맥주가 참으로 맛있었다. 언젠가 문득, 그 여운이 당신 마음에 되살아나기를 바라며. 그럼, 안녕히.